2014년 2월 8일 토요일

하본기 33


2-033.
(원문)
孔甲崩, 子帝皐立。 帝皐崩, 子帝發立。 帝發崩, 子帝履癸立, 是爲桀。 帝桀之時, 自孔甲以來而諸侯多畔夏, 桀不務德而武傷百姓, 百姓弗堪。 迺召湯而囚之夏臺, 已而釋之。 湯修德, 諸侯皆歸湯, 湯遂率兵以伐夏桀。 桀走鳴條, 遂放而死。 桀謂人曰 : “吾悔不遂殺湯於夏臺, 使至此。” 湯乃踐天子位, 代夏朝天下。 湯封夏之後, 至周封於杞也。

(음역)
공갑붕, 자제고입。 제고붕, 자제발입。 제발붕, 자제이계입, 시위걸。 제걸지시, 자공갑이래이제후다반하, 걸불무덕이무상백성, 백성불감。 내소탕이수지하대, 이이석지。 탕수덕, 제후개귀탕, 탕수솔병이벌하걸。 걸주명조, 수방이사。 걸위인왈 : “오회불수살탕어하대, 사지차。” 탕내천천자위, 대하조천하。 탕봉하지후, 지주봉어기야。

(주석)
1. 공갑(孔甲)-2-032-주석11 참고.
2. 고(皐)-공갑의 아들이다.
3. 발(發)-고의 아들이다.
4. 이계(履癸)-발의 아들이고 달리 계(癸)라고 일컫는다. 52년 동안 재위하였다. 그는 문무를 겸비하고 힘이 장사였지만, 난폭하고 음란하여 나라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탕에 의해서 쫓겨나고 굶어죽었으며, 역사상 유명한 폭군으로 일컬어졌다. 상(商)나라의 탕왕(湯王)이 그의 시호를 흉악하고 난폭하다는 의미의 걸(桀)로 지었다.
5. 걸(桀)-이계를 참고할 것.
6. 제후(諸侯)-1-002-주석3 참고.
7. 내(迺)-이에 내(乃)와 같다.
8. 하대(夏臺)-하나라의 감옥으로 달리 균대(鈞臺, 均臺)라고 일컫는다. 양적(陽翟)에 있으며, 오늘날 하남성(河南省) 우주(禹州) 근처이다.
9. 탕(湯)-곡(嚳)의 아들 설(契)의 14대 손자로 성은 자(子)이고 이름은 이(履)이며, 달리 상탕(商湯), 성탕(成湯), 무탕(武湯), 천을(天乙), 성당(成唐), 대을(大乙), 고조을(高祖乙) 등으로 일컫는다. 하남성(河南省) 상구(商丘) 출신으로 하나라 말기에 방백(方伯)의 직책으로 전문적으로 대외정벌에 종사하다가 상족(商族)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하나라 걸왕(桀王)에 의하여 남소(南巢)로 쫓겨났다가 명조(鳴條)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상을 건국하였다. 재위 30년으로 그중에서 17년은 하나라의 제후국인 상의 제후였고, 나머지 13년은 상의 국왕이었다.
10. 명조(鳴條)-하나라와 상나라 시기 중원의 지명으로 고후원(高侯原) 이라고도 일컬었다. 현재 지명으로는 3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 하남성(河南省) 신향시(新鄕市)이다. 둘째, 낙양(洛陽)이다. 셋째, 산서성(山西省) 운성하현(運城夏縣)이다. 현재 둘째 주장이 비교적 우세하다. 명조의 전투는 역사상 유명한 전쟁으로, 탕이 하나라의 걸왕을 정벌할 때 여기서 전쟁하여 승리하였다.
11. 방(放)-추방하다.
12. 천(踐)-오르다, 즉위하다.
13. 기(杞)-기원전 11세기 주(周)나라의 제후국으로 기원전 445년 초(楚)나라에 의하여 멸망당했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商)을 정벌하고 우왕(禹王)의 후손을 찾아서 기를 봉토로 주고 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국역)
공갑왕이 사망하고 아들 고왕이 즉위하였다. 고왕이 사망하고 아들 발왕이 즉위하였다. 발왕이 사망하고 아들 이계가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걸왕이다. 걸왕의 통치시기에 이르러, 공갑왕 이래로부터의 제후들이 대부분 하나라를 배반하였고, 걸왕은 덕치에 힘쓰지 않고 무력을 사용하여 백관을 해쳤으며, 백관들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걸왕은 이에 탕을 불러들여 하나라의 감옥인 하대에 가두었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를 석방하였다. 탕이 덕치를 행하자 제후들이 모두 탕에게 귀의하였으며, 탕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하나라의 걸왕을 정벌하였다. 걸왕은 명조로 도망갔다가 마침내 추방되어 사망하였다. 걸왕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탕이 감옥인 하대에 있을 때 결국 탕을 살해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것을 후회한다.󰡓 탕은 이에 천자의 자리에 즉위하고 하나라의 천하를 대신하였다. 탕은 하나라의 후손을 책봉하여 제후로 삼았고, 주나라 시대에 이르러 하나라의 후손들은 기에 책봉되었다.

(참고)
명조(鳴條)의 전쟁-대략 기원전 1,600년 전 상탕(商湯)이 명조 즉 현재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부근에서 하(夏)나라를 멸망시킨 전쟁이다. 상탕은 일거에 하나라 걸왕(桀王)의 주력부대를 공격하였고, 걸왕은 소수 군사를 거느리고 남소(南巢) 즉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소호시(巢湖市) 부근으로 도망갔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상탕은 군사를 서박(西亳)으로 돌리고 3,000 제후의 추대를 받아서 하나라의 멸망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명조의 전쟁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무력으로 성취한 역성혁명으로, 후대에는 이 전쟁을 가리켜 󰡒탕무혁명(湯武革命)󰡓 또는 󰡒상탕귀족역성혁명(商湯貴族易姓革命)󰡓 즉 상나라의 탕이 귀족 신분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였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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