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4일 수요일

은본기 23


3-023.
(원문)
帝小乙崩, 子帝武丁立。 帝武丁卽位, 思復興殷, 而未得其佐。 三年不言, 政事決定於冢宰, 以觀國風。 武丁夜夢得聖人, 名曰說。 以夢所見視群臣百吏, 皆非也。 於是迺使百工營求之野, 得說於傅險中。 是時說爲胥靡, 築於傅險。 見於武丁, 武丁曰是也。 得而與之語, 果聖人, 擧以爲相, 殷國大治。 故遂以傅險姓之, 號曰傅說。

(음역)
제소을붕, 자제무정입。 제무정즉위, 사부흥은, 이미득기좌。 삼년부언, 정사결정어총재, 이관국풍。 무정야몽득성인, 명왈열。 이몽소견시군신백리, 개비야。 어시내사백공영구지야, 득열어부험중。 시시열위서미, 축어부험。 견어무정, 무정왈시야。 득이여지어, 과성인, 거이위상, 은국대치。 고수이부험성지, 호왈부열。

(주석)
1. 소을(小乙)-3-022-주석6 참고.
2. 무정(武丁)-이름은 소(昭)이고 42년 재위하였으며,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재위시기에 부열(傅說)을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고, 부인 부호(婦好)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귀방(鬼方)을 정벌하는 등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래서 상나라는 재차 강성해져서 무정중흥(武丁中興)이라고 일컬었다.
3. 은(殷)-3-001-주석1 참고.
4. 좌(佐)-보좌하는 신하.
5. 총재(冢宰)-관직 명칭으로 왕실의 재정과 궁궐의 사무를 담당하는 태재(太宰)를 일컫는다. 지위는 3공(三公)의 아래이고 6경(六卿)의 우두머리이다.
6. 국풍(國風)-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국가의 풍속을 가리킨다. 둘째, 《시경》을 풍(風), 아(雅), 송(頌)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풍은 민간에서 채집한 노래로 국풍이라고 일컫는다. 《시경》의 정수이고, 당시 백성들의 진실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으며 중국 현실주의 시가의 원류이다.
7. 시(視)-자세히 살피다, 비교하다.
8. 백리(百吏)-공경(公卿) 이하의 여러 관리.
9. 백공(百工)-1-027-주석5 참고.
10. 영구(營求)-찾다.
11. 야(野)-성밖.
12. 부험(傅險)-고대의 지명이고, 현재의 섬주(陜州) 하북현(河北縣)이다. 전설에 상나라의 부열(傅說)이 노예로 있으면서 이곳에서 축대를 쌓았다고 한다.
13. 서미(胥靡)-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고대에 죄를 짓고 노역에 종사하는 노예 또는 죄인을 가리킨다. 둘째, 형벌의 명칭 즉 부형(腐刑)을 일컫기도 한다.
14. 견(見)-알현하다.
15. 시야(是也)-바로 이 사람이다, 맞다.
16. 성지(姓之)-성씨를 하사하다.
17. 부열(傅說)-무정시기의 대재상(大宰相)이고, 탁월한 정치가, 군사가, 사상가, 건축과학자이다. 무정이 노예 신분인 그를 발탁하여 재상으로 삼고 자신을 보좌하게 하여 무정중흥(武丁中興)을 이룩하였으며, 〈열명(說命)〉3편을 작성하였다. 후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인, 천신(天神), 몽부(夢父), 천책성(天策星) 등으로 일컬었다.

(국역)
소을왕이 사망하고 아들 무정왕이 즉위하였다. 무정왕이 즉위하고 상나라를 부흥시키려고 생각하였으나, 그러나 보좌할 만한 신하를 얻지 못했다. 3년 동안 정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고 국가 정사는 전부 총재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였으며, 자신은 국가의 풍속만 관찰하였다. 무정이 밤에 꿈을 꾸다가 꿈속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이름이 열이었다. 꿈속에서 본 형상에 따라서 여러 신하와 관리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모두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에 백관으로 하여금 성 밖으로 나가서 찾게 하였고, 부험이라는 곳에서 열을 찾았다. 이때에 열은 죄를 짓고 노역에 종사하는 노예 신분으로 부험에서 축대를 쌓고 있었다. 무정을 알현하게 하니 무정이 말하기를 바로 이 사람이라고 하였다. 무정은 그를 찾은 후에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과연 성인이라고 하였으며, 그를 천거하여 재상으로 삼으니 상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그래서 마침내 부험이라는 지명으로써 그에게 성씨를 하사하고, 부열이라고 일컬었다.

(참고)
무정(武丁)의 공로-무정의 통치 시기는 상(商)나라 역사상 가장 전성기였다. 중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무정 스스로가 수양하고 덕치를 실행했으며, 대외정벌을 통하여 상나라의 정치적 영향을 확대시켰다. 둘째, 노예 출신의 부열과 감반(甘盤) 등 인재를 광범위하게 선발하여 중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무정의 묘호를 고종(高宗)이라고 일컫는 등 무정중흥(武丁中興)을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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